딱 한번, 그 이후딱 한번, 그 이후
< 아르바이트 모집. 2040대 재택근무 가. 主婦도 환영. 시급 5천원. 시간 자유선택. 080-3**-54**>
안명숙은 수화기를 든 채 잠시 망설였다.
080-3**-54**. 활짝 펼쳐진 생활정보신문 <사거리>의 광고난으로 다시 시선을 옮기며 그녀는 전화번호를 몇번 입안으로 굴려 보았다.
'한번 걸어 볼까?’
그녀는 바짝 입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무슨 아르바이트길래···’
그녀는 뻗쳐오르는 호기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080···’
그녀는 다시 한 번 속으로 전화번호를 기억해 보고는 이윽고 다이얼을 돌렸다. 전화 저편에서 신호음이 울림과 동시에 그녀는 급작스레 쿵쾅거리는 가슴의 고동을 느꼈으므로 깊이 한숨을 들이마셔야만 했다.
“네, **전화방입니다.”
서글서글한 남자의 목소리가 신호음을 끊으며 들려왔다.
“에흠!”
그녀는 나즈막하게 헛기침을 하고는 정색을 한 채 입을 열었다.
“저··· 사거리 광고를 보고···”
“아, 네··· 아르바이트 하시려구요.”
남자가 알겠다는 듯 되물었다.
“네··· 그런데, 저··· 어떤 일인지를 잘 몰라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꼬리를 흐렸다. 자꾸만 목이 타고 입안이 말라왔다.
“네에, 그러시군요. 실례지만, 지금 나이가···?”
“스물··· 여덟인데요.”
“그러세요? 그럼 직장인이신가요?”
“아, 아닌데요.”
“그럼···?”
“가정주부예요.”
시시콜콜히 묻는 게 어쩐지 꺼림직했지만 그녀는 남자의 서글서글하고 친절한 목소리에 믿음성이 들어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다.
“아, 그러시군요. 우리 회사에서 아르바이트 하시는 분들 역시 대부분이 가정주부세요. 그런데··· 그렇다면 아마 폰팅 아르바이트가 처음이시겠군요?”
“네, 사실은 그래서···”
“하하하. 그러시군요. 목소리가 참 예쁘신데··· 실상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그냥 전화를 통해 친구와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네에···”
“실례지만 결혼하신 지는 몇 년이나···?”
“3년···”
“그래요, 좀 일찍 하셨네요. 하하. 그럼 자녀는 있으신가요?”
“아직···”
“그럼 시간은 많으시겠군요.”
“그런 편이에요.”
대답을 하며 안명숙은 어쩐지 속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남아 돌아가는 시간들··· 아무리 할 일을 찾아도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시간들···
<사거리>를 보고 전화를 한 것도 따지고 보면 순전히 무료를 달래기 위한 호기심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돈이라면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만큼 있었다. 굳이 아르바이트 따위를 하지 않아도 남편은 충분한 수입을 꼬박꼬박 가져다주었다.
“그러시다면 지금 전화를 하시는 분은 참으로 현명한 선택을 하신 거예요. 우리 회사로 말하자면 업계에서도 알아주는 신뢰도를 자랑하는데··· 고객층도 아주 믿을 만한 분들로만 짜여져 있고··· 에, 시간당 5천원이라는 건 알고 계시죠? 5일씩 끊어서 결산하는데, 17시간만 채우면 시간당 5천원씩 어김없이 통장으로 입금시켜 드리구요··· 17시간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에만 시간당 3천원으로 계산하는 거죠. 하지만 대부분은 충분히 채우고도 남드라구요? 30시간, 40시간을 채우는 분들도 아주 많구요.”
“네에···”
“아무 때고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넉넉잡고 하루에 서너시간만 투자하면 5일마다 칠팔만원, 한달에 사오십만원은 쉽게 벌 수 있어요.”
“네··· 그런데, 저··· 어떻게···”
“아참, 처음이시랬죠. 에···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저 전화를 통해 친구와 수다를 떤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물론 상대가 남자이긴 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거지요. 인생 경험도 되고, 어차피 서로 얼굴도 신분도 모르는 사이이니까 평소에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얘기를 부담없이 나누어도 되고··· 뭐,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담없이 그냥 끊어도 상관없구요.”
“그러니까··· 그냥 전화로 이야기만···”
“그럼요. 그저 전화로 대화를 나누는 것 뿐이에요. 어때요, 한 번 해 보시겠어요?”
“글쎄요··· 생각을 좀···”
“아참, 그러지말고 한 번 시험삼아 테스트를 해 보실래요? 제가 연결시켜 드릴 테니까.”
“네···”
대답하며 안명숙은 꿀꺽 침을 삼켰다.
“일단 한 번 직접 해 보시고, 하실 의향이 있으시면 다시 한 번 전화를 해 주실래요?”
“그럴게요.”
“지금 거신 번호에서 끝자리만 바꾸어 7번으로 걸어 보세요. 자동응답기로 설명이 잠깐 나오고 난 후 신호가 가고 나서 바로 전화를 받는 남자가 대화 상대거든요. 그럼, 아시겠죠?”
“네.”
그녀는 전화를 끊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낯선 남자와 전화로 대화··· 폰팅이란 게 그런 거였구나. 심심한데 한 번 해봐? 맘에 안들면 그냥 끊어도 된다 그랬겠다?’
그녀는 다시 숨을 들이켜서 깊은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맹렬한 호기심이 전율처럼 몸을 덮쳐 왔다.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를 담은 자동응답기의 설명이 나오고 나서 이윽고 한번, 두번··· 딱 세번째 신호음이 울리는 순간 남자의 음성이 수화기 저편에서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굵고 낮은, 차분하면서도 중후한 목소리였다. 안명숙은 문득 설레는 마음을 짐짓 억누르며 마주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목소리가, 너무 매력적이시군요. 혹시··· 아나운서이신가요?”
“네? 아, 아니에요.”
“그래요? 그렇다면··· 성악가?”
남자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배여 있었다. 많이 배운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이 직감처럼 파고들었다.
“그냥, 평범한 여자예요.”
“그래요? 결코 평범한 여자분 같지가 않으신데요. 이렇게 곱고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흔치 않아요.”
“그쪽 분이 오히려 목소리가 아주 좋으신 걸요, 뭐.”
“하하하, 그렇습니까? 이거 아주 기분이 좋은데요. 목소리가 매력적인 분한테서 그런 칭찬을 다 듣다니. 그냥 한번 해보신 말이겠지요만···”
“아녜요, 정말이에요. 목소리가 참 좋으세요. 중후하고 기품있고··· 남자다우세요.”
“이거 오늘 정말이지, 단단히 비행기를 타는군요. 어차피 세시간 후에는 진짜 비행기를 타야할 몸이지만···”
“진짜 비행기라구요? 어디 해외라도···?”
“아녜요, 그런 건 아니고··· 출장 왔다가, 일을 마치고 귀경할 참인데 비행기 시간이 남아 전화휴게실엘 들렀거든요.”
“네에··· 평소에 자주 전화휴게실에 들르시나 봐요.”
“아녜요, 전혀. 사실은··· 오늘이 첨입니다···”
“네? 그래요? 사실은 저도 오늘이 첨인데···”
“그것 참, 인연이로군요. 제가 오늘 행운의 여신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나 봐요. 국내에서 처음 하는 통환데 이렇게 예쁘고 매력적인 분과 이루어지다니···”
“그러면 어디 외국에서···”
“일본에서 몇 년 근무했지요. 거기서는 전화 데이트를 자주 했어요.”
“그래요? 거기에도 한국여자들이 많은가 보죠?”
“한국여자가 아니라··· 일본여자들 하구요.”
“어머나, 그래요?”
“일본여자들은 아주 솔직하거든요.”
“네···”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철저히 존중해 주면서도 자신만의 대화 공간은 또 나름대로 가지고들 사는 거죠.”
“네···”
안명숙은 남자가 일본 이야기를 꺼내자 딱히 할 말이 없어 그냥 대답만 했다. 일본에서 몇 년씩 근무를 하고 국내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다닐 정도면 틀림없이 무슨 큰 회사의 간부급이거나 적어도 중소기업의 사장쯤은 되지 싶었다. 어쩌면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많은 공부를 한 사람일 수도 있을 테고···.
그녀는 남자의 목소리와 남자의 얘기 내용을 바탕삼아 나름대로 추리를 해보기도 하고 그의 얼굴이며 용모를 상상해 보기도 하면서 야릇한 흥분을 느꼈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낯선 타인끼리 단지 전화선만을 통해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이 얼마나 스릴있는 일인가 말이다. 그녀는 왜 진작 이렇게 재미있는 소일거리를 찾지 못했는가 싶을 정도로 남자와의 대화에 깊이 몰두해 들어갔다.
“그건 그렇고··· 첨부터 엉뚱한 얘기만 하다보니, 인사조차 없었군요. 전 이현호하고 합니다.”
“네··· 전···”
안명숙은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이름을 가르쳐 주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저쪽에선 내 전화번호도 모르고··· 이름쯤이야 가르쳐준들 뭐 대수일까···’
“안명숙이라고 해요.”
“아, 안명숙 씨··· 밝을 명 자에 조용할 숙 자를 쓰시나요?”
“네, 맞아요.”
“어쩐지··· 목소리가 이름하고 똑같으시군요. 차분하고 조용하면서도 사람을 밝게 만드는 힘이 있으시니···”
“호호호, 어쩌면 해석이 더 멋지세요.”
“허허헛, 그래요?”
“네, 호호호.”
두 사람은 전화선을 사이에 둔 채 웃음을 주고받았다. 어느 틈엔가 서먹함은 사라져 버리고 옛날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근감이 떠돌았다.
이현호··· 안명숙은 속으로 남자의 이름을 가만히 되새겨 보았다.
‘흐흐흣··· 안명숙이라···’
담배를 꼬나물고 이현호는 터져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순진하기는···’
여자는 초짜답게 처음부터 자신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꼼짝을 못했다. 이름이며 집안 사정이며 전화번호에 이르기까지 안명숙이 가르쳐준 것들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이현호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쌓은 폰팅 경험으로 그 정도는 척하면 간파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목소리가 매력적이라는 칭찬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가 바로 이것이다 라고 할 만큼 안명숙의 목소리는 윤기있고 낭랑했다. 그저 시간 땜으로 폰섹스나 시도할 요량이었던 이현호가 작전을 바꾼 것은 사실 그 목소리 때문이었다. 한번으로 그치기에는 너무 아쉬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안명숙은 너무나도 쉽사리 그 의도에 따라와 주었다. 이현호는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고것 참··· 그 죽이는 목소리로 쌕을 쓰면··· 흐흐흐···’
이현호는 불쑥 솟아오른 사타구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안명숙이 절정에 달해 교성을 지르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마 얼굴도 반반할 거야. 틀림없어···’
이현호는 다시 수화기를 들고 다음 통화 상대를 기다렸다. 이번에야말로 노골적으로 폰섹스를 시도할 작정이었다. 안명숙으로 인해 뜨겁게 솟아오른 물건을 식히는 길은 그 방법 뿐이었다.
‘어쩌자고 내가 집 전화번호까지 알려주고 말았지? 괜히 한밤중에 전화라도 걸려오는 날이면···’
안명숙은 은근히 후회가 되기도 했으나 애써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현호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세계적인 수재들만 다닌다는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고 도쿄 지사장을 거쳐 불과 서른 아홉살 나이에 그 유명한 재벌회사 D그룹의 전무이사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 아닌가. 그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남의 집 파탄낼 행동을 하겠는가 말이다. 비록 전화 통화에 불과했지만 역시 많이 배우고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답게 그의 전화 매너는 깨끗하기 그지없었고 말하는 투 역시 깍듯하기만 했다.
‘그래··· 이현호 씨는 결코 남에게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자 안명숙은 비로소 마음 속에 깔려 있던 구름이 환히 걷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덕분에 안명숙은 어젯밤 남편과의 관계에서 모처럼, 정말이지 모처럼 짜릿한 절정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이런 게 죽는다는 거구나 싶을 정도로 강렬한 오르가슴이었다. 남편이 되려 놀랄 정도로 그녀는 발버둥치며 쾌감에 몸을 떨었는데, 사실 그 배경에는 이현호가 자리하고 있었다.
남편이 먼저 손을 뻗어왔을 때 그녀는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들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남편이 접근했을 때는 팬티를 내리는 손길을 도와 엉덩이만 약간 처들어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남편이 습관처럼 얼굴을 젖가슴으로 가져가 젖꼭지를 핥고 빨기 시작했을 때, 문득 그녀는 낮에 통화했던 이현호가 떠올랐다.
굵고 낮은 저음의 남자다운 목소리··· 싹싹한 매너··· 아마 틀림없이 얼굴도 잘 생기고 체격도 운동선수처럼 멋질 거야··· 그런 일련의 상상들, 낮에 전화 통화를 하면서 제멋대로 상상하며 그려 보았던 그의 모습이 어느 틈엔가 머릿속에 뚜렷한 하나의 상으로 맺혀들면서부터 그녀의 몸은 불현듯 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남편의 행위에 이현호의 모습이 오버랩되자 갑자기 미칠 것 같은 흥분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아··· 이현호 씨, 아··· 아···’
안명숙은 스스로 낯이 뜨거워져 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야릇한 영상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상상 속의 이현호는 007 영화의 제임스 본드처럼 잘 생기고 튼튼한 남자였다. 지칠 줄 모르는 정력과 여자를 이해하는 포용력이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 제임스 본드, 이현호라는 이름의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을 안고 예민한 젖꼭지를 혀끝으로 애무하고 있었다. 그녀는 감당하기 힘든 황홀감에 남편의 머리를 두 손으로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더, 더, 여보! 더, 더 세게 빨아줘요! 아흑!”
갑작스런 그녀의 반응에 놀란 남편이 잠깐 멈칫거리더니 이윽고 입을 크게 벌려 거칠게 흡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물어뜯을 듯이 탐닉하는 남편의 입술에 젖가슴을 더욱 밀착시키며 몸을 비틀었다.
“흐흐, 그렇게 좋아?”
남편이 만족스럽다는 듯 들뜬 목소리로 물어왔다. 남편의 손은 언제부턴지 안명숙의 깊은 샘을 찾아 헤집고 있었다.
“그래, 좋아요. 좋아··· 아! 어머나! 아흑!”
그녀는 스스로의 감각으로 자신의 샘에서 꿀물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움찔움찔 골반이 열리며 무언가 내장 깊숙한 부분이 삐어져 나오는 듯한 그런 감각이었다. 저절로 몸이 뒤틀리고 허리가 높이 처받쳐 들렸다. 남편의 머리를 움켜쥔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만 같았다.
“나, 나, 쌀 것 같애, 여보! 어흑!”
그녀는 정말이지 곧 오줌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간힘을 써서 참지 않으면 침대 전체를 적셔버리고도 남을 만큼의 많은 오줌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세상에, 애무만으로 이런 기분을 느껴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싸, 싸라구, 여보.”
남편이 열에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 남편 역시 잔뜩 흥분해 있었다.
“아, 안돼! 안돼! 아흑!”
급기야 그녀는 안간힘을 써서 붙잡고 있던 긴장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는 폭포수처럼 거세게 오줌줄기를 내쏟고 말았다.
“어머나! 안돼! 안돼! 어쩜 좋아!”
그녀는 부르짖으며 까무라졌다. 절정에 오른 것이다.
“흐흐, 당신 정말 죽이는데··· 이것 봐, 아주 홍수가 났어.”
남편이 그녀의 은밀한 곳에서 손을 떼며 몸을 덮어 왔다. 남편의 목소리가 아득히 먼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이윽고 정신이 들자 그녀는 자신이 오줌을 싼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도 움찔거리는 하체의 감각이 너무나도 황홀하기만 했다. 이렇게 강한 오르가슴도 있구나··· 아직 삽입도 안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어쩐지 남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이제 귓볼을 입에 물며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이미 절정의 순간을 한번 거쳤지만 남편은 바야흐로 시작인 것이다. 귓볼을 거칠게 깨무는 남편의 행위가 다른 때와는 달리 싫지 않게 느껴졌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온 신경을 은밀한 샘에 모았다.
‘이현호 씨···’
그녀는 머릿속으로 부르짖었다.
‘이제 넣어줘요. 내 그곳을 가득 채워줘요. 아···’
그녀는 다시금 달아오르는 자신의 육체를 상상 속의 남자에게 내맡기며 매달렸다. 남자는 아주 크고 우람한 물건을 달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고개를 끄덕거리며 움직이는 그런 물건이었다. 그녀는 있는 힘껏 다리를 벌려 그것을 받아들였다.
“흐-ㅂ!”
뜨겁고 단단한 말뚝이 이윽고 그녀의 비밀스런 샘 가운데로 깊이 박혀들었다. 빈틈없이 채워지는 충일감이 너무나도 뿌듯했다.
‘아앗! 현호 씨!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요···’
그녀는 남편의 등을 힘껏 부여안으며 허리를 튕겨올렸다. 은밀한 샘을 틀어막은 말뚝의 감촉이 너무 짜릿해 그녀는 도저히 허리를 움직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아, 아흑! 아흑!”
그녀는 진저리를 치며 소리질렀다. 다시 절정이 왔다. 아마득히 높은 허공에 치솟아 올랐다가 급전직하로 추락하는, 그랬다가 어느 순간 다시 끝없이 튕겨오르는 그런 오르가슴의 연속이 경련과 함께 찾아들었다.
“어머, 어머! 난 몰라! 난 몰라! 어흐흐흑!”
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말을 비명처럼 내지르며 전율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는 다시 까무룩히 깊은 심연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너무 짜릿했어···’
안명숙은 어젯밤의 방사를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쩐지 아랫배 부근이 묵지근했다. 마치 아직도 남편의 물건을 집어넣은 채로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자신의 그 부분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쥐듯이 가볍게 눌러보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감촉 안으로 어젯밤 욕망의 끈적한 여운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나도 참 주책이지··· 후훗’
그녀는 어젯밤의 황홀경이 어디로부터 온 건지를 잘 알고 있었다. 상상 속의 그 남자가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이현호였고, 이현호는 단지 한 통화의 전화를 통해 그런 짜릿한 선물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그것이 순전히 자신의 상상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고, 현실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 이현호와 현실 속에서 섹스를 나누고 싶은 마음 역시 추호도 없었다. 그 남자가 설령 자신의 상상처럼 제임스 본드와 같은 용모와 정력을 지녔다 할지라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이미 애틋한 사랑을 베풀어주는 남편이 있었고, 그 남편과의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소일거리를 찾는 것과 결혼 생활의 불만족과는 연결 고리가 없는 일이었다. 무료함은 그저 무료함일 뿐인 것이다. 그때 그때 적당한 취밋거리를 만들어서 때우면 그뿐이었다.
그녀는 문득 전화기에 눈을 돌렸다.
‘내가 참··· 무얼 기다리는 거지? 미쳤나 봐.’
그녀는 잡념을 떨쳐 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일어났다.
‘안되겠어. 샤워나 하고 정신을 차려야지.’
바로 그 순간, 벨이 울리고, 그녀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 남자다!’
직감적으로 그녀는 느꼈다. 그녀는 재빨리 심호흡을 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아, 안명숙 씨. 저 이현홉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녀는 스스럼없이 인사를 건네다가, 그런 자신에게 은근히 놀랐다. 외간남자에게 이렇듯 친근하게 인사를 할 수 있다니···. 그녀는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우리··· 지금 당장 폰섹스 한번 합시다.”
“네? 뭐라구요?”
안명숙은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이 남자가 지금 뭐라 했지? 폰섹스라고 했나?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지금 분명히 이현호는 폰섹스를 하자고 한 것이다. 일언반구 얘기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폰, 섹, 스.”
이현호가 또박또박 끊어서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포,폰섹스요?”
“그래요, 나 지금··· 죽을 것만 같아···”
이현호가 반쯤 잠긴 목소리로 말꼬리를 흐렸다. 절박한 침묵과 어우러져 깊은 한숨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폰섹스...
폰섹스라면··· 한마디로 전화상으로 섹스를 나누는 것 아닌가. 안명숙도 여성지를 통해 폰섹스가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안명숙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혼란스러웠다. 느닷없이 거두절미하고 폰섹스라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하버드 출신의 경제학 박사님이··· 굴지의 대기업 전무이사님이··· 너무나 예의 바르게 대화를 나누던 점잖은 엘리트 남성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 폰섹스를 나누자고 하는 것이다, 지금.
“어젯밤··· 한숨도 못 잤어요. 안명숙 씨 때문에··· 그 목소리가 도무지 귓가를 떠나지 않아서··· 후···”
이현호가 말 끝에 기다린 한숨을 덧붙였다.
안명숙은 마치 어젯밤의 비밀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뜨거워졌다. 자신은 남편을 받아들이면서 속으로 이 남자의 이름을 부르고 이 남자의 얼굴을 상상했던 것이다. 그처럼 짜릿한 쾌감이 이 남자를 떠올리며 이루어진 것이라면, 상상 속의 불륜을 즐기며 이루어진 것이라면, 자신이 어젯밤 은밀한 곳에 깊이 받아들인 남성은 사실 남편이 아니라 이 남자였는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는.
“여보세요, 안명숙 씨.”
수화기 저편에서 이현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아무 대꾸가 없자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네··· 듣고 있어요.”
안명숙은 가까스로 목소리를 추스렸다.
“제발··· 끊지 말고 들어요. 알았죠···? 나 지금, 회사 내 방인데··· 당신 때문에 도저히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군요. 부탁이니··· 제발··· 딱 한 번만 우리, 폰섹스 해요.”
폰섹스···.
안명숙은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이 남자는 지금 외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서로의 육체를 마주 대하고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말 그대로 섹스는 섹스 아닌가···.
“나 지금··· 곧 죽을 것만 같아요. 미치겠다구요. 아시겠어요? 당신 목소리··· 당신 목소리 때문이에요. 제발 부탁이니··· 딱 한 번만 소원 좀 풀어주세요.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을 게요. 안 그러면 당신 목소리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거예요.”
이현호는 사뭇 애원조였다.
문득 안명숙은 자신이 어젯밤 누린 그 짜릿한 황홀경이 어쩐지 이현호한테는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이현호를 상상하면서 지상 최대의 쾌락을 맛보았다. 그런데 지금 이 남자는, 나한테 어젯밤 그 엄청난 희열을 안겨준 이 남자는 가엾게도 욕구를 채우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다. 잘 알지도 모르는 여자한테 폰섹스를 부탁할 정도로···.
안명숙은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어젯밤의 여운이 남은 자신의 은밀한 그곳에서 작은 불씨 하나가 솔솔 되살아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어쩜···’
안명숙은 의자에 앉은 채 힘껏 다리를 꼬았다. 불씨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호흡이 불규칙해져 왔다. 안명숙은 달아오른 볼을 쓸어내리며 조그맣게 물었다.
“저··· 어떻게 하면 돼죠?”
막상 그렇게 묻고나자 안명숙은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묘한 호기심과 흥분이 일었다. 어젯밤의 아찔한 감각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해, 해주시는 거죠?”
이현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알았죠?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요.”
“어떻게요···?”
안명숙 역시 절로 목소리가 떨려왔다.
“지금··· 무얼 입고 입죠?”
“네?”
“지금 명숙 씨가 입고 있는 옷 말이오.”
“그냥··· 원피스 차림이에요.”
“자세히··· 자세히 말해 봐요.”
“푸른 색 바탕에, 물방울 무늬가 찍힌··· 그냥 평범한···”
“속옷은···? 속옷은 뭘 입고 입죠?”
“브래지어··· 팬티···”
“무슨 색깔···?”
“···”
“브래지어는 무슨 색이죠?”
이현호의 목소리에는 간간히 한숨인지 뭔지 모를 다급한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안명숙은 다시 한번 마른 침을 삼키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검은색···”
“레이스가 있는··· 화려한 것인가요?”
“그, 그래요···”
“팬티는? 팬티 역시 검정색깔인가요?”
“네··· 그래요.”
“망사···로 된 것?”
“그냥··· 레이스가 있는···”
“벗어요···”
“네···?”
“벗으라구요, 어서.”
“오, 옷을요···?”
“그래요. 어서··· 벗어요. 난 벌써 바지를 벗었다구요. 지금··· 팬티를 벗고 있는 중이에요. 들어볼래요?”
“네?”
전화선을 타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안명숙은 이내 그것이 팬티를 벗는 소리라는 걸 눈치챘다.
팬티를 벗으면··· 안명숙은 눈앞이 아찔했다. 어젯밤 상상 속에서 떠올렸던, 그리하여 자신의 몸 깊숙히 파고들었던 그 우람한 물건, 뜨겁고 단단한 말뚝··· 충일감··· 안명숙은 저도모르게 하체가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다. 꼬아부친 다리 사이로 팽팽한 긴장이 근육을 당겼다.
“들었어요? 난 이미··· 다 벗었다구요. 명숙 씨도 빨리 벗어요.”
“아, 알았어요···”
안명숙은 반사적으로 문 쪽을 한번 쳐다보고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어깨를 가볍게 틀어 원피스의 소매 부분을 밀어 내렸다.
“벗고 있어요?”
이현호가 채근하듯 물었다.
“네··· 지금···”
“다 벗었어요?”
“네···”
원피스를 벗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양 어깨 밑으로 흘러내린 원피스는 잠깐 허리께에서 멈추었다가 안명숙이 엉덩이를 살풋 들고 밀어내리자 다소곳이 의자 밑으로 떨어져 갔다.
“브래지어도 벗어요.”
안명숙은 수화기를 턱 사이에 낀 채 손을 등뒤로 돌려 브래지어 호크를 끌렀다. 브래지어 역시 호크가 풀리자마자 자연스럽게 몸에서 떨어져 내렸다. 약간의 오한감이, 그보다 훨씬 큰 전율과 함께 덮쳐 왔다.
‘나는 지금 폰섹스를 하고 있다··· 얼굴도 모르고 만난 적도 없는 낯선 남자하고···’
그러나 서로의 얼굴도 모르고 만난 적도 없다는 사실이 안명숙을 더욱 더 흥분시키는 것이었다. 안명숙은 주체할 수 없이 뛰노는 가슴을 간신히 억눌러야만 했다.
“벗었어요···”
“그럼, 팬티를 벗어요. 내가 들을 수 있게끔···”
“어, 어떻게요···?”
“수화기를 바짝 갖다 대요. 그리고 가능한 한 부스럭거리면서···”
“아, 알았어요···”
안명숙은 자석에 끌린 것처럼 수화기를 다리 사이로 갖다 댔다. 그리고는 이현호가 시킨 대로 일부러 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면서 팬티를 말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수화기를 귓가로 옮겼다.
“들려요···?”
“그래요, 아주 선명히··· 후··· 지금, 그럼 다 벗은 거죠? 틀림없이?”
“네···”
“젖꼭지를 만져요···”
젖꼭지를 만져요··· 안명숙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난 지금··· 내 페니스를 만지고 있어요··· 아··· 이놈이 있는 대로 성이 나서 벌떡거리고 있어요···”
“···”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비틀어 봐요···”
안명숙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젖가슴에 손을 댔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젖꼭지를 비틀어 보았다. 순간 아찔한 현깃증이 전신을 훑어왔다. 안명숙은 눈을 감고 그 감각에 몰두했다. 점점 숨이 가빠왔다. 이현호가 자신의 성난 물건을 주무르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크게 클로즈업되었다. 그의 우람한 물건이 발기해 있는 모습이 그린 듯 떠올랐다.
“음···”
안명숙은 다리를 더욱 거세게 꼬며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좋아요, 바로 그거야. 후우···”
이현호가 소리쳤다.
“지금 내 손이 당신 젖통을 주무르고 있어··· 아··· 좋아 탄력이 아주 대단해··· 아주 싱싱한 몸이야, 아···”
이현호의 호흡이 거칠어 있는 게 역력히 들려왔다.
“그래요··· 아··· 좋아···”
안명숙은 자신도 모르게 이현호의 말에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옷을 다 벗고나자 어느샌가 부끄럼이나 망설임 따위는 멀리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호기심과 욕망이 그 자리를 대신 메우고 있었다. 금단의 열매를 몰래 따먹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스릴과 함께 욕망의 불에 기름을 끼얹고 있었다.
“내 걸 만져봐··· 어때, 크지? 이런 건 처음 볼 걸?”
“그래요··· 정말 커요···”
“당신 가슴도 훌륭해, 정말··· 그런데··· 거긴 어때···? 거긴 괜찮아···?”
“거기···라뇨? 어디요?”
“당신··· 그거. 있잖아··· 아랫입술··· 거긴 괜찮아? 주스가 잔뜩 흘러내리진 않았어? 어서··· 만져봐···”
이현호가 말하기 전에 이미 안명숙은 손을 뻗어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더듬고 있는 중이었다. 그곳은 벌써 흥건히 젖어 있었던 것이다. 안명숙은 손가락을 세워 그곳에 끼운 채 다리를 꼬아 비틀었다. 정말이지 그곳은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안명숙은 마치 상대가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콧소리를 냈다.
“만지고 있어요, 벌써··· 아··· 나, 미치겠어요···”
“흥분돼 죽겠지? 그렇지?”
이현호는 어느y 반말투로 바꾸고 있었으나 안명숙은 개의치 않았다. 어쩌면 그게 더 매저키스틱한 쾌감을 주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요··· 흥분돼 죽겠어요···”
“내 이름을 불러봐. 부르면서 말해···”
“현호 씨··· 아! 음··· 나, 미치겠어요···”
“그곳을 문질러. 수화기로 막 문지르면서 소리를 들려 줘, 어서! 명숙 씨, 어서··· 으···”
“네··· 알았어요··· 음···”
안명숙은 수화기를 가져가 자신의 음부에 대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수화기를 통해서 그 은밀한 소리가 직접 이현호의 귀에 들려진다는 생각을 하자 자극의 강도가 훨씬 세지는 것만 같았다.
안명숙은 한참을 그러다가 수화기를 들러 올렸다.
“어때요··· 들려요···?”
“그래··· 흐··· 너무 잘 들려··· 나, 곧 쌀 것만 같아, 으음··· 못 참겠군··· 당신한테 박고 싶어··· 어때, 당신도 나하고 하고 싶지? 그렇지?”
“네··· 그래요··· 나도··· 아!”
“그래, 좋아··· 당신 그 매력적인 목소리로 쌕소리를 내봐. 어서··· 그 소리가 너무 너무 듣고 싶다구··· 부탁이야···”
“소, 소리요···?”
“그래··· 쌕을 써 보라구··· 오르가슴에 올랐을 때처럼 소리를 질러 보라니까, 어서···”
안명숙은 그러잖아도 마음껏 소리라도 내지르고 싶던 참이었다. 한창 뜨거워져 있는데 결정적인 걸 할 수 없다는 한계를 떠올리자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기만 했던 것이다. 안명숙의 몸은 이제 누군가가 식혀 주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달아올라 있었다.
“아, 알았어요··· 음! 아···! 아흑!”
안명숙은 자신의 은밀한 샘을 손으로 부벼대며 동시에 교성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튿날.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대충 집안일을 마무리한 안명숙은 소파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시간은 이제 오전 11시밖에 되지 않았다. 다시 무료한 하루가 시작되는 참이었다.
‘정말 지겨워··· 무슨 재미난 일 없을까···?’
안명숙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쇼핑에도 취미가 없었고, 나들이는 화장하기 귀찮아서 하기 싫었다. 동네 아낙들끼리 모여 앉아 시시덕거리며 수다를 떠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젠 싫증이 났다. 그렇다고 수영장엘 다닌다거나 꽃꽂이 학원 같은 델 다니는 것도 취미에 맞질 않았다. 독서라고는 여성지가 가장 재미있었으나 그것도 월초 며칠을 때워주질 못했다. 그러니 나날이 무료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어젠 증말··· 내가 미쳤지···’
안명숙은 어제 있었던 이현호와의 폰섹스를 떠올리곤 쓰게 웃었다. 생판 모르는 남자와 옷까지 벗고 적나라한 장면을 연출하다니··· 미쳐도 보통 미친 노릇이 아니었다.
‘후-, 그래도 정말이지 짜릿했어···’
미친 노릇이 분명하긴 했지만 짜릿했던 것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낯선 상대, 보이지 않는 상대가 주는 묘한 호기심과 스릴··· 남편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죄책감이 주는 또다른 쾌감··· 아무나 할 수 없는 짓을 자행하고 있다는 야릇한 일탈감··· 그런 것들이 복합되어 더욱 가슴을 떨리게 만들었던, 정말이지 평소에는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던 짜릿한 경험이었다.
물론 일말의 불안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낯선 남자에게 저도 모르게 이끌려 집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고 그 남자와 너저분한 폰섹스를 나누었다는 점이 마음에 영 께름직한 그림자를 던져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일 남편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막연한 불안이 문득문득 뒤통수를 아프게 후려치기도 했다. 그러나 안명숙은 이현호의 사람됨을 믿었다. 명색이 박사에 대기업 최고 간부가 아닌가.
‘설마··· 이현호 씨는 그럴 사람이 결코 아니야···’
더구나 자신은 그의 소원 아닌 소원까지 들어준 입장이다. 어느 골빈 여자가 단 두 번째의 통화에서 폰섹스를 해준다는 말인가. 하도 이현호의 처지가 딱해 보여서 수치와 부끄럼을 무릅쓰고 폰섹스 상대가 되어주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런 자신에게 이현호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쓸데없는 짓을 하겠는가. 오히려 고마워 하면 고마워 했지 이현호는 그럴 남자가 아니었다.
안명숙은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그러자 저으기 안심이 되며 어제 나눈 폰섹스의 짜릿함이 다시 상기되었다. 그리고는 은연중에 전화벨이 울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내가 정말 미쳤나 봐.“
안명숙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게 짜릿하고 아찔해도 그렇지 더 이상은 안될 말이었다. 남편과의 잠자리에서 다른 남자를 상상하는 것만도 아니될 노릇인데 그 남자와 폰섹스까지 계속 잇는다는 건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일탈은 한번으로 족했다. 그 이상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안되겠어, 내일 당장 번호를 바꿔 버려야지. 그래도 혹시 만일이라는 게 있잖아···’
안명숙은 오늘밤 당장 남편에게 말해 전화번호를 바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꾸만 이상한 장난전화가 걸려온다는 핑계를 대야겠다는 것까지 생각해 두었다. 난생 처음 폰섹스라는 걸 경험해 본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 것은 어쨌든 경솔한 짓이었다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내일이면 영원히 인연 끝이야···’
그리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자신의 가슴 속에만 남아있는 짜릿한 추억이 될 것이다. 안명숙은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비밀스런··· 그것으로 만사 오케이인 것이다.
‘그래, 좋아!’
이현호는 결심을 굳혔다.
‘믿져봤자 본전이다!’
그는 담배를 뽑아물고 여유 있게 불을 붙였다. 안명숙을 불러낼 계획이 선 것이다. 잘 될지 어쩔지는 몰랐지만 나름대로는 치밀하게 세운 전략이었다.
안명숙은 틀림없이 계획대로 따라와 줄 것이다. 이현호가 분석한 바에 이하면 그녀는 단순한 여자였다. 첫 통화에서 집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 걸로 보나 두 번째 통화에서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폰섹스를, 그것도 기대 이상으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들어준 걸 보면 순진한 정도를 넘어 머리가 좀 모자라거나 아니면 세상 물정을 기가 막힐 정도로 모르는 쑥맥이거나 했다. 그렇지 않다면 천성적으로 음탕한 심성을 타고났거나···.
아무튼 그 경우라도 이현호에게는 상관없었다. 미련하건 단순하건 쑥맥이건 음탕한 여자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목적은 단 하나, 안명숙을 불러내 욕심을 채우면 그만이었다. 그 죽이는 목소리··· 사람의 심금을 울릴 정도로 자극적이고 섹시한 그 목소리··· 그 목소리를 가진 여자를 만나 직접 육체의 쾌락을 나누며 그 목소리로 지르는 교성을 눈앞에서 듣는 게 목적이었다.
‘흐흐흐··· 안명숙, 넌 내꺼야···’
이현호는 자신의 물건을 주물럭거렸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던 들뜬 교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벌써 기가 충만해져 벌떡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라, 내 새끼야. 이제 곧 뜨끈뜨끈한 연못에서 헤엄을 치게 해줄 테니까··· 흐흐흐···’
이현호는 자신의 발기한 물건을 내려다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애초에 그는 안명숙을 어떻게든지 꼬득여 폰섹스를 단 한번이라도 나눌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니 폰섹스가 아니라도 좋았다. 그 비슷한 얘기만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그러면서 자위행위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참이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쉽게, 염려했던 게 허탈할 지경으로 손쉽게 안명숙은 폰섹스 요구를 들어 주었다. 나름대로 절박한 감정을 연기하느라 애를 쓰기는 했지만 어쨌든 생각 이상으로 잘 응해 주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신이 더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었다. 틀림없이 안명숙은 스스로도 즐겼음이 분명했다. 그 꾸밈없이 질러대던 쌕소리가 그걸 증명해 주고 있었다.
폰섹스를 하며 모처럼 오랜만에 만족할 만한 쾌감을 느끼며 사정을 맛본 이현호는 전화를 끊자마자 마음을 달리 먹었다. 단순한 폰섹스로는, 그것도 한 번으로 그치고 말기에는 너무나 아쉬웠던 것이다. 폰섹스만으로도 그렇게 사람을 죽이는데 진짜로 한다면 얼마나 끝내 줄까,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이현호는 안명숙을 기필코 따먹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밤새 뒤척이며 머리를 굴렸던 것이다.
이현호는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거침없이 다이얼을 돌렸다.
‘흐흐흐··· 안명숙. 어젯밤엔 너 때문에 잠도 못 잤다구. 밤새 성난 물건 달래느라 죽을 노릇이었지···’
신호음이 이어지는 걸 들으며 이현호는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잭팟을 터뜨렸을 때처럼 가슴이 벌렁벌렁 물결쳐 왔다.
“여보세요.”
신호음이 거의 일고여덟 번이나 울렸을 즈음에야 마침내 안명숙의 그 윤기 있고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달려와 안겨들었다.
“나야.”
이현호는 짧게, 그리고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네?”
“나, 이현호라구.”
“네? 아···”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보이는 목소리였다.
“지금 빨리 나와. 알겠지?”
“네? 뭐, 뭐라구요?”
안명숙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가며 떨리고 있었다.
“한국말도 못 알아들어? 씨팔, 지금 나오란 말야, 썅년아! 알았어?”
이현호는 짐짓 언성을 높여 꾸짖듯 소리쳤다. 동시에 찰칵, 전화가 끊어졌다.
‘흐흐흐··· 그럴 줄 알았지. 정신이 없을 걸.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지. 흐흐···’
이현호는 다시 담배를 꼬나물었다.
‘설마···’
안명숙은 어지러웠다. 씨팔, 지금 나오란 말야, 썅년아··· 이현호의 거친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앉아 맴돌고 있었다.
‘설마··· 이현호 씨가··· 설마···’
안명숙은 도무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전화기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갈피를 잡아보려 애쓰고 있었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느닷없이 당장 나오라고 하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욕설과 함께 소리부터 질러댄 것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이현호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다소 거칠고 톤이 높아지긴 했지만 굵은 바리톤의 목소리··· 그리고 억양··· 틀림없었다. 그러나 어제 폰섹스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철철 넘치게 보여지던 친절이나 교양은 눈꼽만치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뒷골목 건달패 같은 분위기만 물씬 풍겼다.
‘도대체 왜 갑자기···’
엉겁결에 끊고 말았지만 안명숙은 이현호가 어쩌자고 느닷없이 그런 전화를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시 폰섹스를 요구하는 전화였다면 이해가 갔다. 내일 당장 번호를 바꿀 결심을 하긴 했지만 오늘 다시 한 번 전화가 걸려온다면 못 이긴 척 폰섹스의 짜릿함을 맛볼 생각까지 은연중에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전화 코드를 빼버릴까?’
모든 게 전화를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다. 전화 코드만 빼버리면 전화를 통한 세계와는 단절이다. 그러면 예전과 같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평범하고 무료한 일상으로 되돌아 갈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명숙은 그게 최선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코드를 빼버리면 이 순간 잠깐 단절이야 되겠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다. 이현호는 다름아닌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으며 당장 오늘 밤에라도 전화질을 해대기 시작한다면 남편에게 들키지 말란 법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든 내일 전화번호를 바꾸기 전까지는 이런 전화가 걸려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쩌면 이현호는 다시 전화를 걸어올 것이고 다짜고짜 나오라고 한 까닭을 얘기해 줄 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다시 걸어올 것이다. 안명숙은 직감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직감은 맞아 떨어졌다. 깊고 적막한 산 속의 정적을 깨뜨리는 싸이렌 소리처럼 그렇게 벨이 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안명숙은 떨리는 손길로 조심스레 수화기를 들었다. 목젖을 타고 마른 침이 힘겹게 넘어갔다.
“왜 끊어? 너, 인생 다 살고 싶어?”
예상대로 이현호였다. 안명숙은 가까스로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무어라고 대꾸할 말을 찾았다.
“이번에도 멋대로 끊으면 끝장날 줄 알아. 니 남편한테 이혼 당하기 싫으면 내 말 끝까지 듣고 알아서 결정해. 알았어?”
이현호는 거침없이 늘어놓았다.
“여, 여보세요··· 이현호 씨··· 도대체 무슨··· 저는···”
안명숙은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입안이 바짝 말라붙어 발음조차 제대로 되지를 않을 지경이었다.
“흐흐흐··· 잘 들어, 이년아. 어제 우리가 한 폰섹스 기억하지? 그거 다 녹음해 놨어, 알아? 흐흐흐··· 네 쥑이는 쌕소리며 숨소리까지 하나도 안 빼고 그대로 다 시디에 들어있단 말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네? 노, 녹음···이라뇨?”
“이년이 귓구멍에 걸레를 틀어막았나. 잘 들어, 이 썅년아. 어제 우리가 한 폰섹스를 내가 첨부터 죄다 녹음해 놨단 말야. 알겠어? 그러니까 당장 나와! 만약 30분 내로 안 나오면 이 녹음 시디를 수백개 복사해다가 동네에 쫙 뿌려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물론 네 남편한테도 선물로 보내주고 말이야. 흐흐흐···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아마 네 남편이 무척 좋아할 걸. 포르노도 그런 포르노는 없을 테니까···”
“여, 여보세요··· 이현호 씨···”
“여기, 잘 들어, 여기가 어디냐면 말이야. 00백화점 알지? 00백화점 바로 길 건너에 보면 라인카페라고 있어, 이층에. 라, 인, 카페, 알았지? 30분이야, 흐흐흐··· 정확히 그 안에 도착하지 않으면 난 이곳에 없을 거야.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에는 난 책임 못져, 알았지? 참, 그리고 말이야. 나올 때 술값좀 갖고 와. 마침 출장비가 다 떨어졌거든. 오케이?”
찰칵.
전화가 끊어졌다. 이번에는 이현호가 일방적으로 끊었다.
안명숙은 한동안을 수화기를 붙잡은 채 망연히 서 있었다. 머릿속에서 벌떼가 윙윙거리는 것 같았다. 폰섹스··· 녹음 시디··· 동네 사람들··· 남편한테··· 이현호의 말이 생생하게 살아 머릿속을 날아 다녔다.
‘그럴 수가···’
안명숙은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내동이치듯 수화기를 놓자마자 소파로 달려가 쓰러져 엎드리고 말았다.
‘설마··· 그럴 수가···’
안명숙은 어제 나눈 폰섹스를 한 장면 한 장면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이현호와 주고받은 대화도 되새겨 보았다. 눈앞이 핑 도는 것 같았다. 그 적나라한 대화며 교성··· 그것을 동네 사람들이 듣는다면··· 아니 그보다도 남편이 듣는다면··· 끔찍했다.
안명숙은 문득 시계를 쳐다봤다. 바늘은 열한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현호가 30분 이내라는 말을 했을 때 저도 모르게 시계를 보았었는데 그 때가 열한 시 삼십분이었다. 벌써 10여분이 흐른 것이다. 이현호가 말한 시간은 이제 20분이 남아 있었다. 00백화점까지 가는 데는 택시를 타도 집에서 15분이나 걸린다. 그렇다면 여유 시간은 5분밖에 없는 셈이다.
안명숙은 재빨리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마음이 다급했다.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이 일었지만 일단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이 행동을 서두르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만나서 이 일을 마무리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뇌리를 지배했다. 그냥 망연히 앉아서 닥칠 결과를 기다리기엔 안명숙의 마음이 너무나 여렸다.
‘안돼··· 이럴 순 없어··· 나가면 안돼···’
블라우스 단추를 꿰며 안명숙은 생각했다.
‘안 나가면···? 안 나가면 녹음 시디를··· 안돼, 그건 안돼···’
스커트를 여미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나가? 나가서 만나면? 그 남자가 그냥 술이나 한잔 먹고 곱게 보내줄 것 같아? 틀림없이 엉뚱한 요구를 할 거야.’
안명숙은 마지막으로 스타킹을 신으려다 문득 다시 블라우스를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브래지어를 벗어 던졌다. 속옷을 갈아입을 참이었다.
‘무슨 요구?’
등뒤로 브래지어 호크를 채우는데 평소와 다르게 힘이 들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던 탓이었다.
‘뻔하잖아? 그 남자가 요구할 게 뭐가 있겠어? 그는 폰섹스를 요구했던 남자야. 변태성이 농후한 남자라구··· 그러니 보나마나···’
안명숙은 팬티를 끌어 내렸다. 그리고 새 팬티를 집어들었다.
‘경찰서로 가야해... 가서 모든 걸 밝히고 도움을 청해야 해...’
‘경찰서에 가면? 그 다음은...? 이현호가 아직 뭔가 해꼬지한 것도 없는데 경찰이 일을 해결해 줄 수가 있을까...? 오히려 일만 복잡하게...’
‘아냐··· 카페로 나오라는 걸 보면 돈을 요구하려는 게 틀림없어··· 술값을 가져오라 했잖아. 출장비가 떨어졌다고 했어···’
스타킹을 신으려다 안명숙은 잠시 망설였다.
‘아니 어쩌면 그 둘 다일지 몰라···’
안명숙은 거들을 착용하기로 했다. 몸에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거들은 스스로 입고 벗는데도 무척 힘이 들 정도로 조임성이 좋았다. 안명숙은 서둘러 거들을 입고 그 위에 다시 팬티스타킹을 덧입었다. 그녀는 이현호가 엉뚱한 요구를 해온다면 절대 그걸 들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거들을 껴입은 것은 그런 의지를 저도 모르게 표현한 것이었다. 만일의 경우에 대한 일종의 보험이랄까···
‘돈이라면 얼마 정도는 줄 수 있어··· 그걸로 깨끗이 끝날 수만 있다면···’
안명숙은 택시에 오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일단 이현호를 만나 시디의 존재 여부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여러 가지로 고민을 거듭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디의 존재 여부에 따라서 대응을 달리하기로 결심했다. 시디가 단순히 협박을 위해 꾸며낸 것이라면 좋은 말로 타일러서 끝낼 생각이었다. 경찰에 알렸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결과는 시디가 존재하는 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그러니 좋은 말로 타일러 다시는 전화를 못하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만일 실제 그런 시디가 있다면, 그때는 준비해 간 돈을 이용해 살살 구슬러 어떻게든 해 본다···. 안명숙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지만 사실 딱히 어떻게 한다는 구체적인 대안은 없었다. 그저 상황에 따라 대처할 셈이었다.
<라인카페>로 오르는 이층 계단을 밟으며 안명숙은 시계를 보았다. 열두시 팔분. 팔분이나 늦어 있었다. 이현호는 정시에 도착하지 않으면 자리를 뜬다고 했다. 안명숙은 초조한 마음으로 카페 문을 밀고 들어섰다. 도중에 차가 밀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본담···?’
안명숙은 하다못해 인상착의라도 일러주지 않은 이현호가 새삼 원망스러웠다. 어쨌든 일단 만나 보려면 하다못해 무슨 옷을 입었는지라도 알아야 알아보기라도 할 것 아닌가 말이다. 안명숙은 제발 이현호가 아직 기다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동시에 혹시 아는 얼굴이 있지는 않나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실내를 훑어보았다. 다행히 아는 얼굴은 없는 것 같았고, 한쪽 구석진 자리에 혼자 앉아 대낮부터 맥주잔을 앞에 두고 있는 젊은 남자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남자를 보자마자 안명숙은 첫눈에 그가 바로 이현호임을 눈치챌 수 었었다. 그는 태연한 모습으로 출입구 쪽을 바라보며 앉아 시디 한 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명숙과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시디를 살짝 들어올려 보였는데 그것으로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확인은 끝난 셈이었다. 안명숙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이현호를 향해 걸어갔다.
“8분 늦었어.”
안명숙이 다가가자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이현호가 느물거렸다. 안명숙은 엉거주춤 선 채 저으기 놀랐다. 그가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명숙은 이현호가 한눈에 보기에도 키가 아주 크고 떡대가 건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얼굴 생김도 상상했던 모습은 아니었지만 꽤 시원스럽게 생긴 호남형이었다.
‘이렇게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안명숙의 놀람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뭐해? 앉아.”
이현호의 채근을 듣고서야 안명숙은 잠시의 놀람에서 깨어나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폰섹스의 적나라한 기억을 공유해서일까. 안명숙은 이현호가 어쩐지 전혀 처음보는 남자가 아닌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왜 늦었어?”
“차가 밀려서요···”
안명숙은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쩌면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안명숙을 팽팽한 긴장에서 다소나마 해방시켜 주었다. 이현호의 악해 보이지 않은 인상 때문이었다.
“이거··· 한 번 틀어 볼까? 저기 오디오가 있는데···”
이현호가 맥주병을 들더니 빈잔에 하나 가득 채워서는 안명숙 앞으로 쓰윽 밀어놓으며 던지듯이 불쑥 중얼거렸다.
“네?”
안명숙은 얼른 감이 잡히질 않아 반문했다.
“이거 말이야.”
이현호가 시디를 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진짠지 가짠지 확인해 보고 싶지 않아? 저기 카운터에 있는 오디오에 넣고 한 번 틀어 달라고 해 볼까?”
안명숙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숙였다.
“음··· 아··· 여보, 여보··· 나 죽어··· 흐흐흐···”
이현호가 상체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낮으막하게 읊조려댔다. 안명숙은 그게 무슨 소리인 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어제 자신이 했던 소리였다. 폰섹스를 나눌 때 흥분에 겨워 내뱉았던 소리인 것이다.
“어때, 이게 가짜 같아?”
이현호가 시디를 내밀었다. 안명숙은 자신의 코앞에 놓인 시디를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가져. 집에 가서 틀어보라구. 물론 혼자서 은밀히 말이야. 혹시 남편한테 들키면 안되지 않겠어?”
안명숙은 눈물이 솟구치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핸드백에 넣어 둬. 난 원본이 있으니까 염려 말고··· 흐흐흐···”
안명숙은 그러나 그 시디를 집을 수조차 없었다. 이렇게 자신 있게 구는 태도를 보면 괜한 헛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자, 그건 그렇고···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선 건배부터 하자구.”
이현호가 잔을 들더니 안명숙 앞에 놓인 잔에 가져다 가볍게 부딪고는 단숨에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빈잔을 안명숙 앞으로 쓰윽 내밀었다.
“한잔 쳐봐.”
안명숙은 고개를 들고 원망과 증오가 뒤범벅된 시선으로 이현호를 쏘아보았다.
“왜. 기분 나빠? 그렇다면 당장 일어나서 나가. 그러면 될 거 아냐?”
이현호가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난 아무래도 상관 없으니까··· 흐흣.”
안명숙은 아무 말 없이 맥줏병을 들어 이현호의 잔을 채웠다. 이러다가 누군가 아는 사람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까지 가세해 안명숙은 더욱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어서 빨리 이현호와의 일을 마무리 짓고 이 자리를 벗어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안명숙은 이현호의 잔에 맥주를 채우고 나자 빈병을 내려놓으며 이윽고 가슴 속에 맴돌던 말을 꺼냈다.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거예요?”
목이 메여 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안명숙은 이현호를 쏘아보았다.
“무얼···?”
“도대체··· 왜 이런 짓을···”
“잠깐. 지금 이 자리가 그런 얘길 나누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해?”
이현호가 손을 들어 안명숙의 말을 막더니 의외로 고분고분한 말투로 되물었다. 첫 통화를 나눌 때의 바로 그런 말투였다.
“안명숙 씨, 잘 들어. 나도 쓸데없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아, 알겠어? 그러니··· 우리 자리를 옮겨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자구. 이곳은 너무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 좀더 조용한 곳에서··· 의논하면··· 나도 남자야··· 알았지?”
안명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인카페는 도심 한복판에, 그것도 백화점 코앞에 있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안명숙도 내심 그 점이 마음에 걸렸던 터였다.
“그럼, 일어나자구···”